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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가격 변동에 흔들리는 김 산업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제언 -김인정 도의원-
    <가격 변동에 흔들리는 김 산업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제언> 김인정의원(전남도의회 안전건설소방위원회/진도) 최근 김은 명실상부하게 전남 어업의 ‘스타’로 자리 잡았다. 한류 열풍과 함께 외국인들 사이에서 건강식품이면서도 간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높아지는 김의 인기와 더불어 가격도 크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지난 7월 기준 마른김 도매가격은 한 속(김 100장)당 평균 1만700원으로 지난해보다 55.4% 올랐고, 마른김 10장의 소비자가도 1천326원으로 지난해보다 30% 상승했다. 8천원 수준이던 김밥용 김 한 봉지도 반년 만에 1만1천원대로 30∼40%나 급등했다. 그런데 또 최근에는 물김 산지가격이 급락하고 있어 도내 김 양식 어가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수산업관측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물김 산지가격은 kg당 2,2254원으로 전월 대비 50.9% 하락했다. 산지가격은 마른김 등 각종 김 가공 제품 가격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가격의 안정성이 매우 중요하다. 때에 따라 급격히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변동성이 지속된다면 어민 소득이 불안정해져 김 양식 어가가 줄게 되고 이에 따라 김 가공업체의 원가 부담이 커져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의 피해는 결국 소비자가 지게 되는데 김이 한국 식문화에서 중요한 식재료임을 생각하면 김 가격의 변동성은 가계의 식비 부담으로 이어지게 된다. 최근의 변동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김 수급 안정을 위해 추진한 정부 정책의 일시적인 부작용일 가능성이 높다. 김 수요와 가격이 폭등하자 작년 4월 정부는 김 양식장 면허 확대를 확대했는데 이에 따라 불법 김 양식도 함께 늘었다. 양식 면적이 폭증하며 공급량이 급증하니 가격이 급락하게 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정확한 수요 예측을 통해 김 생산량을 적절하게 유지해야 한다. 정확한 수요 예측과 이를 통한 생산 관리를 강화하여 김 생산량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과잉 생산으로 인한 가격 급락을 방지하고 안정적인 공급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김 가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안전사고와 지역민 간 분쟁을 야기하는 불법 무면허 김 양식에 대한 지도·단속이 필요하다. 전남도는 지난 8월부터 무면허 양식시설에 대한 신속한 초기 대응을 위해 10개 연안 시군과 합동으로 불법 양식시설 설치행위 단속에 나서고 있지만 향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김 양식 어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원도 필요하다. 양식시설 자동화, 첨단화 설비 지원을 확대하고, 김을 지역특화품종으로 집중 육성하여 김 양식 경쟁력을 높여 어촌 고령화와 인구 감소에 대응하는 지역의 신성장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물김을 곧바로 가공할 수 있는 산지 물류시설의 확충도 절실하다. 해양수산부는 물김의 주생산지인 전남에 산지거점유통센터 1개소를 신축하고, 나주 소비지분산물류센터를 증축하여 물류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를 위한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물김 가격 변동 문제는 단순히 지역 산업과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이다. 필자가 제시한 다양한 해결책들을 종합적으로 시행하여 문제 해결에 나선다면 어민들의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하고, 소비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며, 김 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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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1
  • 기고]'국가유산청' 출범.."목포무안신안 서둘러야" 이창훈교수(국립목포대학교 조경학과)
    이창훈교수(국림목포대학교 조경학과) [뉴스전남]2023년 5월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해 온 '문화재(文化財)’라는 재화적, 물질적 성격이 강한 개념에서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유산(헤리티지,Heritage)으로 발맞추고자 「국가유산 기본법」이 제정되었다. 이로부터 1년 뒤인 2024년 5월 17일에는‘문화재청’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국가유산청’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국가유산’에는 한국의 특수한 가치와 인류 보편의 가치를 포괄하는 유산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주목할 사안으로는 기존 법체계에서 자연유산을 아우르지 못하였던 부분을 제도적으로 보완하면서 체계적인 보존 및 활용이 기대되는 바이다. 국가유산 중 대단위 면적이며, 자연환경에 기반한 역사·문화가치를 수반하고, 관광연계가 가능한 유형은 ‘자연유산’의 범주에 속한 명승, 천연기념물, 전통조경 등이 대표라 하겠다. 2002년 실시된 주5일근무제 도입에 의한 여가시간 활용의 패러다임 변모, 코로나19 이후 실외지향적인 여가공간 선호 등은 자연유산 문화재가 사람들로부터 휴식의 장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었을 경우 국가로부터 관리 및 유지비용이 해지되기 전까지 영속되므로, 잠정적으로 무한적 제정확보는 말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국가유산으로의 지정관리는 미래 세대를 위한 완전성을 담보하는 데 도움이 되며, 지역사회 내에서 더 강한 정체성과 연속성을 조성할 수 있다. 지정구역의 정비를 시작으로 주변 구역은 지자체의 적극적 의지에 따라 관광증진을 위해 활용이 가능하다. 국가유산 지정 인한 주변의 관광활성화는 가장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하다. 방문자 지출, 지역연계 관광, 새일자리 창출, 숙박업 활성화, 잠재적 국제 관광객 유치 등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전남지역에는 바다, 섬, 갯벌, 마을숲 이라는 발굴되지 않은 천혜의 자원들이 무수하다. <비금도 성치산성과 봉화대> 1)신안의 경우 신규 발굴하기 위해서는 원시경관, 문화경관, 해양자원, 탄소중립 자원 측면 등으로 다양한 기초조사를 통한 부처 연계사업을 계획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국영목장 위치도> 2)무안은 바다-구릉-황토로 이어지는 해양갯벌경관이 우수하다. 그리고 조선시대 최대규모의 군마훈련소로 사용되었던 망운목장의 장기적인 복원으로 세계유산(UNESCO) 등재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3)목포는 근대역사문화공간 내부에 포함된 13개의 근대건물의 매입절차를 통해 하나의 관광플랫폼으로 시청 혹은 도청 차원에서 보존·관리할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영광 칠산도 노랑부리저어새> 4) 영광군은 칠산도에 서식하는 노랑부리저어새 보존을 위한 환경개선 및 모니터링을 지속하여 지구의 생물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윤리적 의무를 이행하는 선행도시로 주목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국가유산청 출범에서 주목할 점은 기존 지자체에 권고사항으로 맡겨두었던 향토문화유산, 그리고 사각지대에 놓여 사라져가는 유산까지도 중앙에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출범 첫해이지만, 2030년까지 조직확대와 예산증대라는 계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라남도에서는 신속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유산을 적극 발굴하고 시·군 등급, 도등급으로 다량 확보하여, 추후 국가에서 전체적으로 관리할 시기가 도래하면 자연스레 국비를 영구히 얻을 수 있는 포전인옥(抛塼引玉)의 지혜를 기대해 본다. 전라남도 지역에 위치한 역사·학술·경관적으로 우수하고 대표성이 높은 명소에 대하여 무분별한 개발을 최소하고, 자연유산으로서의 가치활용에 대한 범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길 바라며 마치도록 하겠다.(끝) "편집자주] 이창훈 교수는 문화재청 현장에서 10년이상 근무한 조경문화 전문가로 ,<영산강 느러지 명승지정 학술연구> ,<무안 창포호 생태공원, 도시숲 조성> <1004섬 신안블루그린 네트워크>,<영광 천연기념물 번식지환경 개선>.<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3D디자인공간>, <전남도민 섬과 바다의 명승 경관 투어> <드론영상의 AR글래스를 이용한 경관시스템> 등 학술연구 현장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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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9
  • 특별기고4]'22세기 목포' 세계적 기업도시,월드시티(World City) 만들자! 박재홍이사(헬로미디어)
    박재홍이사(헬로미디어) 뉴스전남]10년 뒤 30년 뒤 50년 뒤 미래 목포는 어떤 도시로 변모해 있을까? 100여년 전 목포는 비록 대한제국의 힘이 아닌 일제의 세계 전략에 의해 식민지 전략도시, 수탈항으로 만들어 졌으나 당시 전국 6대도시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현재 목포 등 전남 서남권은 ‘인구소멸, 지역소멸’ 위기 속에 ‘신재생에너지와 환경트랜드‘라는 희망이 교차하고 있다. 이런 중에 목포에서 30년이상 교직에 몸담아 오면서 희망의 목포를 꿈꾸고 있는 박재홍이사(헬로미디어)의 글을 4차례에 걸쳐 기고한다.마지막 4번째 순서이다. (편집자주) 1]목포라는 도시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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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8
  • 특별기고3]목포를 중심으로 전남 서남권,어떻게 바꿀 것인가?박재홍이사(헬로 미디어)
    박재홍이사(헬로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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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5
  • 특별기고 2]목포는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가? 박재홍이사 (헬로 미디어)
    박재홍이사(헬로미디어) 뉴스전남]10년 뒤, 30년 뒤, 50년 뒤... 미래 목포는 어떤 도시로 변모해 있을까? 100여년 전 목포는 비록 대한제국의 힘이 아닌 일제의 세계 전략에 의해 식민지 전략도시, 수탈항으로 만들어 졌으나 당시 전국 6대도시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현재 목포 등 전남 서남권은 ‘인구소멸, 지역소멸’ 위기 속에 ‘신재생에너지와 환경트랜드‘라는 희망이 교차하고 있다. 이런 중에 목포에서 38년 교직에 종사했으며 여전히 '희망의 목포'를 꿈꾸고 있는 박재홍이사(헬로미디어)의 글을 4차례에 걸쳐 기고한다. 2번째 순서이다 (편집자주) 1]목포라는 도시 안에 무엇을 담을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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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1
  • 특별기고 1]목포라는 도시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박재홍(헬로 미디어 이사)
    박재홍(헬로미디어 이사) 뉴스전남]10년 뒤 30년 뒤 50년 뒤 미래 목포는 어떤 도시로 변모해 있을까? 100여년 전 목포는 비록 대한제국의 힘이 아닌 일제의 세계 전략에 의해 식민지 전략도시, 수탈항으로 만들어 졌으나 당시 전국 6대도시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현재 목포 등 전남 서남권은 ‘인구소멸, 지역소멸’ 위기 속에서 ‘신재생에너지와 환경트랜드‘라는 희망이 교차하고 있다. 이런 중에 목포에서 38년 교직에 몸담았고 '희망의 목포'를 꿈꾸고 있는 박재홍이사 (헬로 미디어)의 글을 4차례에 걸쳐 기고한다.(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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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1
  • 기고]전남의 '혁신리더십'은 누구? -토정 이지함과 해상왕 장보고 리더십-
    조선 토정 이지함과 신라 장보고의 혁신리더십 1. 혁신과 개혁 2. 막스베버 관점에서 본 토정 이지함과 장보고의 혁신 리더십 3. 현대 한국,전남의 선출직 리더십에 대한 시사점 4.참고]조선중기 토정 이지함 생애와 업적 5.참고]신라 하대 해상왕 장보고 생애와 업적 1]혁신과 개혁 혁신과 개혁은 모두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정도와 방법에 차이가 있다. 혁신은 기존의 풍속이나 관습, 조직, 방법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하고 개혁은 기존의 것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거나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혁신은 개혁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오고, 더 많은 전략과 노력, 시간이 필요하다. 혁신과 개혁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혁신(革新):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 개혁(改革):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 500년 전의 토정 이지함과 1200년 전 해상왕 장보고에 대해 혁신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색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비전과 전략, 실천력의 리더십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토정 이지함과 장보고는 섬과 바다를 혁신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20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의 정치사회 리더십 이론을 적용해 보고자 한다. 막스베버는 정치사회적 리더의 기본조건으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꼽았는데 이는 그 시대의 문제점과 본질을 꿰뚫어보고 해결점을 찾으려는 비전과 전략을 세우고 해결하려는 현실 인식과 실천 행동을 갖춰야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지함과 장보고 두 분의 혁신 리더십에 대한 가설적 접근과 함께 현재 우리 국내 현대 정치와 사회,지역에 주는 시사점과 접목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논의의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2] 막스베버 관점에서 본 토정 이지함과 장보고의 혁신 리더십 100년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의 정치사회 리더십 이론을 5백년전 조선, 1200년전 신라의 국내 인물에 적용한다는 것은 조금 억지스런 측면도 있다, 그러나 리더십의 본질을 국내 인물에서도 찾아보자는 한 시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막스베버(1864~1920)가 리더십 이론을 강조한 것은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하고 패전비용 지불과 경제난등 국가적으로 힘든 시기였던 1919년 독일의 뮈헨 대학생을 대상으로 ‘소명(직업)으로서의 정치’강연이었다. 베버는 강권력을 가진 권위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전통적 권위(가문, 왕조), 두 번째는 카리스마적 권위(비범한 능력과 지도력/ 간디 나폴레옹 비전), 세 번째는 법적 합리적 권위(조직의 믿음,현대 선거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권위가 각각 분리되고 배타적인 것이 아닌 비전 업적 등에서 공통점을 가진 경우도 있다고 했다. 특히 베버는 권위의 구분을 떠나 국민의 안전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소명으로서 직업 정치인이 갖춰야 할 두 가지 덕목으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강조했다. 첫째 신념윤리는 자신이 꿈꾸는 가치와 이상, 비전에 대해 물불 가리지 않고 기개와 정열적으로 추구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대중 선생이 강조했던 ‘서생의 문제의식’ 처럼 선비는 옳다고 생각하면 앞 뒤 가리지 않고 죽음까지 불사하며 자신의 가치실현에 혼심의 힘을 쏟는다. 두 번째 책임윤리는 정치인은 자신이 하는 정치적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목표한 바를 추구하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이나 긍정,부정적 결과 등 부수적 영향을 치밀하게 계산하는 이른바 ‘상인의 현실감각’의 필요성이 정치가로서 책임있는 자세라는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신념 윤리가는 ‘신념의 실현 결과보다는 신념실현 그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선한 목적’을 위해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부작용도 감수하는 경향을 보인다. “신념윤리에만 집착하는 정치가는 신념 실현의 결과가 자신의 의도와 어긋났을 때는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지 내가 그런 건 아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으며,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고 이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뿌리 뽑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반면 책임윤리는 행위로부터 예견되는 결과와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줄 아는 태도다. “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대의와 이념·가치도 중요하지만 이런 신념을 현실에서 실현하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며,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게 진정한 정치인의 모습이다.” 베버는 정치적 선의(善意)가 반드시 결과적 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정치인을 젖먹이 ‘유아(幼兒)적 정치인’이라고 했다. 또 “책임윤리를 망각하는 순간, 정치인의 신념은 이미 좌절된 신념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베버는 두 가지 윤리를 적절하게 겸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다. 그것이 어렵다면 책임윤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정치인의 올바른 자세라고 했다. 막스베버는 정치인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가치와 이념적 관점에 따라 일방적으로 밀어부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 아니며 부작용이나 결과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 좋은 정치라며 신념윤리와의 조화와 균형을 통한 책임윤리에 더 큰 방점을 두고 있다. 특히 베버는 선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마키아벨리즘이라는 공격도 받았으나 신념윤리를 정치윤리의 한축으로 삼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즘과는 구분이 된다. 좋은 정치를 펼친다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 천만의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만큼 고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직업보다도 뛰어난 도덕적인 마음과 통찰력, 책임과 용기 그리고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자신이나 집단의 신념에 헌신하면서도 목표나 목적을 실현하는 데 타협과 조화를 할 수 있는 책임윤리를 갖춘 인물을 정치인으로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치인의 자질은 신념과 책임이라는 두 개 윤리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최적의 선택을 통해 균형을 발견하는 능력을 발견하는 능력에 있다. 이같은 100년전 독일 베버의 정치리더의 자질로 꼽은 ‘도덕(비전)적 신념윤리와 결과적 책임윤리의 균형’은 21세기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후광 김대중 선생의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조화’와도 연결되는 측면도 있다. 어쨌든 사회학자베버가 강조한 리더십 이론은 정치만이 아닌 가족에서 학교, 사회조직, 관료계, 공공기관, 기업집단에 이르기까지 활발히 인용 거론되고 있다.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추진하는 리더에게 세 가지 구체적 과제로 목적과 방향이 분명한 “열정(비전)과 책임감(전략).균형감”을 꼽았다. 1)열정(비전)은 불명확한 구호성 비전이 아닌 확실한 목적과 손에 잡히는 결과를 예견하고 추진 가능한 명확성을 갖춰야 한다. 2)책임감(전략) 주도적 방법론과 구조와 제도적 보완책 3)균형감(조직) 개방성 다양성을 가진 조직구성과 실천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베버가 이같은 변혁적인 리더십 이론을 만들고 강조했던 시기는 1차 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정치적,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가 아니었고 이대로 가면 독일이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국내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도래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도전에 나선 사상과 세력 인물이 생기고 성공과 실패 좌절로 이어져 후대의 교훈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9세기 신라하대 장보고가 어렸을 적 당나라로 건너갈 당시 신라사회는 귀족들의 권력분쟁과 골품제의 신분제약, 그리고 계속되는 흉년 등으로 서민들은 경제난과 생존에 어려움이 계속됐고 곡식을 얻기 위해 수 백 명이 위험한 뱃길에 목숨을 걸고 바다 건너 중국으로 구걸하는 행각이 이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성행했던 해적이나 난민 등을 통해서 당나라의 군사 사회문화 정보 또한 비교적 중국 해상 접근이 용이한 서남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완도 바닷가 근처에 살며 무력과 용맹을 갖춘 10대 또는 20대 초반의 장보고로서는 이른바 ‘용병’이라는 ‘차이나 드림’을 꿈꾸고 중국에 진출해 무장으로서의 일정 부분 성공을 거뒀다. 장보고는 왜 무장이 아닌 해상 무역상으로의 변신을 꾀했을까? 어느 국가든 왕실과 정책을 다루는 고위층에 외국인 용병을 쓰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당나라에서 무력으로 성공한 고구려유민출신 절도사 '이사도 세력의 몰락'을 보며 군이 아닌 무역을 꿈꿨을 것이다. 장보고는 재당시절 신라백제 유민들의 해상무역활동 현장경험을 통해 꼼꼼히 점검하고 해상무역의 강점을 파악한 뒤 사업 추진 방향과 전략 실행을 준비했을 것이다.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장보고리더십이 중국-완도-일본에 해상무역거점을 만드는데 성공한 요인은 무엇일까 신념윤리는 먼저 해적을 소탕해 신라인의 해상 안전 활동을 보호하고 해상무역으로 일자리 창출로 민생을 돌보겠다는 비전을 들 수 있겠다. 책임윤리로는 선박 건조와 뱃길 운영기술에 특출한 신라 백제유민들의 강점을 파악하고 자신의 고향에 도자기제조창을 만들어 도자기 해상무역을 주도하겠다는 전략을 들 수 있겠다. 더구나 당나라에서 무장을 지내고 나름 중국 배후에 힘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장보고의 제안에 신라 왕실로서도 위험하거나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828년 신라 흥덕왕은 흔쾌히 승낙하고 장보고를 청해진대사로 임명했다. 장보고의 해상무역에 대한 비전(열정)은 이처럼 명확했다 1)해적소탕 국민안전보호 2)해상무역 민생경제회복 또 책임(전략)은 1) 중국의 적산법화원과 완도 청해진 한중일항로 거점활용 2)중국 첨단 월주요 도자기술 국내 도입 3)영산강,강진,해남의 강점 활용(흙,땔감,뱃길 선박건조 등) 마지막 세 번째 균형감으로서는 신라 왕과 중앙귀족은 물론 중국의 문인이자 관료인 두목이나 일본의 승려 엔닌 그리고 중국의 일본 무역관리 등 1)중국과 일본의 정치 종교 관리들과도 각별한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개방성과 포용성 특히 2)재당 신라인과 청해진 민군을 결집해낸 조직력은 장보고 한중일 해상무역 출발의 원천이었다. 특히 9세기 당시로서는 한중일 해상국제무역을 경제에 도입한 혁신리더십으로 볼 수 았다. 다음은 조선 중기 포천,아산 현감을 지낸 토정 이지함의 리더십을 베버 이론에 적용해보자. 역시 토정이 살았던 16세기 조선중기는 개국초기의 위민정신은 약해지고 사농공상, 양반과 중인,양인,천민 등 엄격한 신분제와 직업제가 강화됐다. 연산군 이후부터는 군역과 요역(국가의 노동력 징발), 공납의 의무가 양반과 중인에겐 제외되고 일반 백성(양인)에만 지워졌다. 백성들은 과중한 조세와 공물, 군역을 피하기 위해 소작농이 되거나 노비 또는 유랑민으로 전락해갔다. 당시 서민들의 어려운 상황을 율곡 이이는 이렇게 전한다. “요즘 정치가 어지럽고 관리들의 수탈이 가혹하고 각종 부역 동원도 자주 있다. 굶주림이 거듭되고 전염병이 잇따르니 젊은이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약한 백성은 구덩이에서 허덕이고 있다. 밭과 들은 모두 황무지가 되었고 100리 안에서 민간의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없으니 그 상황이 비참하고 처량해 사람들이 저절로 눈물을 흘린다.”(율곡전서) 이지함 역시 20년 넘게 야인 생활을 하면서 전국 곳곳을 주유하고 특히 뱃길을 이용해 섬과 바다 곳곳을 다니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현장을 목격하고 해결책을 고민했다. 토정 이지함의 신념윤리는 백성들의 먹고 사는 경제문제 해결이었다. 해결방안으로 조선왕조가 중요하게 여기는 농업을 본으로 삼고 말업으로 여기는 천업인 수산업과 염업 해상무역 등으로 보완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국부를 쌓자는 혁신론을 제기했다. 책임윤리로 백성을 살리는 시범시책으로 특정한 섬을 지목해 관이 주도하는 수산업과 소금산지로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실행방법으로 관에서 노동력을 따로 징발하지 않고 개별 인부를 모집해 임금을 주겠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과 현재도 유지중인 행정관할주의를 국가 필요에 따라 일정기간 다른 시군이 활용하자고 상소한다. 특히 아산현감 때는 자체 큰 집이라는 ‘걸인청’시설을 지어 유랑민에게 맞는 작업을 주고 구제하는 자립복지시설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지함 리더십의 백성들의 가난구제에 대한 비전(열정)은 당시 제도가 말업으로 규제하고 금지하는 수산업과 광업,상업 해외 무역 등을 민간에 자유로 허용하자는 명확성과 국부론의 혁신성을 띠고 있다. 국내 일각에서 이지함의 국부론은 자원배분의 효율성과 자유무역주의 국부론의 아담스미스보다 200년 앞섰다고 주장한다.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거지만 당시 완고한 조선 정부 관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민생구제의 책임(전략)으로서도 지역특성을 살리는 꼼꼼한 현장경험을 통해 구체적인 지역을 지목해 어떤 방법으로 사업을 하고 운영하는 방법까지 세심하게 제안하고 이 사업이 성공할 경우 다른 섬과 사업으로 연계하자는 대안과 다양한 산업의 활성화 방안 등을 제시하고 있다. 외부 학문과 사상에 개방적인 이지함은 16세기 유럽이나 중국 일본 등의 경제 흐름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세 번째 균형감(조직)은 이지함 개인은 서경덕에서 이이 등 서인과 동인의 파벌,붕당을 초월하고 신분관이나 직업관에 얽매이지 않은 다양하고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강점관점의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자체 경제적 인맥과 재력 등 실력을 보유한 해상왕 장보고의 현실적 혁신 리더십과 달리 국가개조론과 실용을 통한 이지함의 뛰어난 혁신적 정책제안을 받아들여 시행하는 중앙왕조의 정치적 개혁집단의 부재를 어떻게 해소하려 했는지는 과제로 남는다. 3] 현대 한국 사회, 전남의 선출직 리더십에 대한 시사점 장보고와 이지함은 시대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로 해석된다. 일단 토정이 본 조선시대 구조적 문제는 양민을 농토에 붙잡아 세금징수가 쉬운 지나친 농업 의존 정책과 사농공상의 폐쇄적 수직적 사회로 보고 있다. 토정의 1차 목표는 백성의 빈곤구제에 역점을 두고 있다. 개방성과 역동성으로 상징되는 바다와 섬 상업 광업 수공업 등 당시 지배층의 생각과 정책의 대전환을 강조한다. 최근 현대 한국사회도 헬 조선으로 상징되는 금수저와 흙수저론의 신분과 부의 세습화, 지역소멸론, 사회 양극화, 대기업의 독점화, 저출산, 고령화 등 관점에 따라서는 조선시대와 유사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차이가 있다면 조선시대는 수직적 신분적 폐쇄성과 지나친 농업의존정책이 문제였다면 현대는 산업화, 도시화,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빚어진 원인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와 달리 비교적 개방적인 시대에 살았던 장보고대사는 가까운 인접국가의 경제유통문화 트랜드를 꼼꼼히 점검하고 지역의 강점을 활용한 대외교역의 현장중심 사고를 강조하고 있다. 장보고, 이지함이라면 현대 한국사회와 지역에 어떤 혜안을 줄 것인가. 이를 해소하는 해법의 하나는 산업화 도시화 정책의 대전환 그리고 중앙에만 의존하지 않는 지역 스스로의 자구노력일 것이다. 농어촌 특히 한반도 육지 영토의 5배 가까운 섬과 바다에 접한 연근해 공간을 어떻게 생산적 자립형 유통 공간으로 활용할 것인지 우리들에게 다시 되묻고 있는 것이다. 특히 '윤석열정부 대한민국호'가 격랑과 파도에 흔들리는 가운데 , 올들어 광주전남의 지역간 현안으로 떠오른 '광주 군공항의 무안 이전 문제'와 '전남권 의대 유치'를 둘러싸고 해당 광주전남지역의 단체장 등 선출직 행정리더들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행위 또한 "비전(열정)과 책임감(전략), 균형감(조직)"을 갖춘 혁신리더십으로 볼 수 있는 지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1.20세기 막스베버의 리더십 (신념윤리,책임윤리)과 21세기 김대중의 서생적 문제의식,상인적 현실감각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2. 토정 이지함 , 해상왕 장보고대사가 현재에 주는 시사점은? :업적 성과 예측에 앞서 먼저 현장중심의 사고의 중요성 3. 이순신장군의 임진,정유전쟁에서 보여준 리더십과 신념윤리, 책임의식 시사점 : 백의종군~명량해전~ 고하도(판옥선 40척 건조)~고금도(판옥선 30척 건조)~ 노량해전 3. 지역의 리더가 갖춰야 될 신념윤리 책임윤리 덕목 1)최근 광주전남지역 자치단체장들이 광주 군공항 무안이전을 둘러싼 정치행정적 행위는 혁신리더십인가? 2)전남권 의대 설립을 둘러싸고 대학간, 지역간 갈등을 유발하는 기초 광역단체장의 행정 리더십은 ? ---------------------------------------------------------------------- 4.참고]조선중기 토정 이지함 생애와 업적 토정 이지함(1517~1578). 토정비결의 저자이고 패랭이와 삼베옷, 짚신과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양반답지 않은 양반의 기인행각을 연상한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조선시대 신비스런 인물로 각인되고 있다. 토정은 조선중기 유교 성리학의 이분법적 지배 이념에 도전하고 백성의 가난구제에 초점을 두고 시대를 뛰어넘는 구체적인 경제 국부론의 대안도 제시했던 혁신적인 현실개혁론자였다. 토정 이지함이 살았던 시기는 먼저 살펴보자. 토정이 태어나기 직전의 연산군에서 중종과 인종, 명종, 선조 초에 숨지기까지 16세기 조선 중기는 중앙척신과 지방사림 간의 정치적 갈등과 죽음을 부른 4대사화(무오/갑자/기묘/을사사회)가 집중되는 극심한 대립기였다. 특히 양민에 대한 극심한 수탈과 각종 자연 재해까지 겹쳐, 당시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토정 이지함은 포천현감 당시 선조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 ‘부모 잃은 고아가 오장에 병까지 들어 죽음이 아침저녁에 있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심각했다. 그 때를 지방권력의 확대를 위한 붕당의 시대, 한국 유학 사상의 완성기, 유교 정신문화의 성숙기로 불려지기도 하지만, 모두 양반 유학자였던 중앙관료와 지방사림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사상을 연구하고 누구를 위해 다투고 싸웠는가. 이들에게는 백성들의 고통 해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혈통과 신분이 일생을 좌우하는 시대인 만큼 입으로는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공자 맹자의 유학사상을 떠받들지만 현실적으로 백성들은 당연히 그렇게 어렵게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여기는 시대였던 것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왕조 말기까지 해금정책과 함께 섬과 바다를 천시해왔던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나라였다. 심지어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면서 해금정책을 해제하고 일부 개방정책으로 전환했지만 조선은 명나라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사대의 대의명분아래 해금정책을 줄곧 유지해 왔다. 조선 지배층의 해금정책은 사대라는 명분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피지배층인 백성을 농업과 농토에 묶어둠으로써 사회 신분의 고정성과 폐쇄성 등을 통해 봉건질서를 유지하는 장점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 유교 성리학 사상이 당시 말업(末業)이라고 천시했던 상업과 광업, 수산업 등은 유통과 섬, 포구, 바다 등을 통해 물자와 정보, 사상이 교류되고 비교되는 개방공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봉건 왕조들은 개국 초기에 상대국의 국경을 넘나드는 상업과 해상무역을 속박하고 금지하였던 것이다. 토정 이지함은 충남 보령에서 고려말 정도전, 정몽주등의 제자를 길러낸 대유학자 목은 이색의 6대 손으로 태어난 양반 출신이다. 토정은 조선전기 중종 12년에 태어나 인종 명종 대를 거쳐 선조11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토정의 생애 전후인 16세기 시대적 사회적 상황은 각종 사화와 당쟁이 심했으며 조선 개국 초와 달리 당시 지배층의 토지겸병이 확대되고 토지세금과 군역, 요역이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강제됨으로써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던 시기였다. 이지함은 자신이 살았던 시기를 나라의 존망이 달린 위기사태로 진단하고 지배층이 중요하게 여기는 본업인 농업으로는 백성들의 가난구제가 불가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농업을 본업으로 하되 수산업과 광업 등 이른바 말업으로 어려움에 빠진 본업인 농업을 보충하자는 절충안을 상소문을 통해 제시했다. 바다와 섬에 눈을 돌려 바다 섬의 강점을 살려 백성의 가난 구제를 하자는 구체적인 대안을 담은 토정의 획기적인 주장은 조선전기에서 후기까지 심지어 개혁론자로 일컬어지는 대유학자 이이에서 정약용에 이르도록 개혁성향을 지닌 성리학자들의 건의나 상소 등에서 조차 찾아볼 수 없다. 토정 사후 200년이 지난 북학파에서 박제가 등 일부 학자들이 제기했을 뿐이다. 토정은 실용주의와 실천을 앞세운 경세사상가이자 사회복지 실천가이기도 했다. 특히 재야의 기인 토정과 제도권 관료 모범생 율곡 이이와의 독특한 친분 관계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토정 이지함은 조선 성리학의 거목인 율곡 이이(1536~1584)보다 20여년 앞서 태어났고 비록 추구하는 학문의 길과 삶의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는 두 사람의 생각과 교류관계는 비교적 활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토정 이지함이 생애 마지막 해인 1578년 아산 현감 때 질병으로 숨지자 율곡 이이가 큰 별이 졌다며 슬퍼했으며 6년 뒤에 이조판서였던 율곡이 죽자 선조가 통곡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이는 토정선생 술회기에서 "내가 일찍부터 속마음 내비치고 조금의 장벽도 없었다. (토정)선생은 나에게 인망(人望)을 요구했고 나는 선생에게 천방(天放)을 조금 거둘 것을 요청했다. 서로를 살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늦은 공업(功業)을 얻기를 빌었다." (이이의 석담일기) 토정유고를 보면 이지함과 이이와의 각별한 관계가 실려 있다. 토정은 당시 조선사회를 ‘부모 잃은 고아가 오장에 병까지 들어 죽음이 아침저녁에 있는 사회’라고 했고 율곡은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산산이 깨진다는 뜻으로 당시를 위기 국면으로 본 것이다. 조정의 고위 관료였던 율곡에 대한 선조의 신뢰는 대단했고 토정도 율곡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머리가 뛰어난 율곡은 선조의 정책이 맘에 들지 않으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곤 했는데 당시 야인이었던 토정이 율곡을 찾아가 그래서 안 된다고 설득하는 대목도 있다. 토정은 율곡을 자신의 사상과 정책을 실행해 줄 고위 관료로 생각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같은 이이의 기록을 통해 기인으로 불렸던 토정 이지함의 정신세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본(本)과 말(末)의 상호 보완론 토정 이지함은 50대 중반을 넘어 유일로 관료로 천거돼 두 차례 지낸 현감 시절 백성들의 가난과 고통 실상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을 담은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 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은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 직업제 사회에서 농사로는(農本)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어려우니 말업(어업 염업, 광업 상업)으로 보강하자는 내용이다. 즉 왕조에서 천시하는 상공업을 발전시켜 농업 소득의 한계를 보완하고 부국(富國)과 안민(安民)을 도모하지는 내용이다. 이른바 바다와 섬의 강점을 활용해 백성의 어려움을 타개하자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는 해금정책을 유지하면서 바다와 섬을 천시하는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토정은 구체적으로 전라도 만경현 앞의 양초도를 어업수산기지로, 황해도 풍천현 앞의 섬인 초도정을 소금생산기지로 만들어 그 곳에서 생산된 물고기와 소금을 곡식으로 바꿔 백성을 구제하고 국가 재정에 보태자고 제안했다. 이밖에도 토정 이지함은 야인시절 한 섬에 주민들과 박을 심어 그 박 수 만개를 팔아 곡식으로 바꿔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 등 자원으로서의 바다와 섬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왜 토정 이지함은 조선시대 지배층이 금기시했던 바다와 섬을 중시하게 됐고 바다의 섬을 백성의 가난을 구제할 창고로 여기게 됐을까. 토정은 태어난 곳이 충남 보령으로 바닷가와 접한 곳이고 상업 포구의 중심지인 한강 마포에 토정을 지은 것을 보면 어렸을 적부터 바다와 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보고 듣고 자랐을 것이다. 또 토정은 비록 양반 가문으로 태어났지만 삶은 순탄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종조할아버지 이파가 연산군 시절 폐비윤씨 사건이 벌어졌을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는 이유로 아버지 이치는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진도로 유배되고 중종반정 이후 벼슬길에 나갔으나 지함이 14살 때 5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광산김씨도 2년 뒤 숨을 거뒀다. 형 지번 밑에서 공부를 했으며 지번도 몇 년 뒤 벼슬도 나가기 전에 유배생활을 했다. 지함은 10대 때 부모를 여의고 형 아래서 공부하며 겪은 평지풍파를 보면서 세상을 보는 눈과 입장을 세웠으리라 생각된다. 또 지함이 스무살 전후에 결혼한 처가 장인은 모산 수 이정랑으로 태종 이방원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줬던 2대 정종의 증손이다. 10여년 뒤인 1549년 토정 32세 때 장인이 충청도 이홍윤 역모사건으로 몰려 처형당하면서 지함도 연좌제에 걸려 벼슬 진출이 좌절되고 도피행각을 벌이면서 기인의 행각을 벌인 게 아닐까 추정된다. 앞서 1년 전 1548년 을사사화를 비판하는 시정기 작성사실이 밀고 되면서 처형된 예문관 검열관인 친구 안명세의 죽음도 벼슬살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일었을 것이다. 그 후 자신의 출생지인 보령과 거주지인 서울 마포를 근거지로 전국을 유람하면서 민생의 현장을 보았으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의 나이가 56세인 1573년, 재야인사 관리 추천제도인 유일(遺逸)로 종6품직 관직에 제수, 포천 현감이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휼하자는 자신의 소가 무시되자 곧 사직했다. 1578년에는 아산현감에 제수되어 걸인청(乞人廳)을 세우는 등 백성 구휼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충남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충청도 대표 의병장이자 토정 이지함를 스승으로 따르고 섬겼던 제자 중봉 조헌(1544~1592)이 토정사후에 벼슬을 내려달라는 상소문에 따르면 이렇다. "그가(토정 이지함)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스스로의 몸을 숨긴 것은 화를 피하였다가 조정이 밝아질 때 시용되고자 함이오, 전적으로 세상에서 은둔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중봉의 상소에 나옴) - 출처 토정 유사 (한국의 민속종교사상, 삼성출판사) ■ 왜 섬과 바다인가 – 현장중심과 강점관점의 지역관, 인재관 지함의 셋째아들 산룡이 섬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한 것을 보면 지함은 장인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앞서 고향 보령에 내려온 가족을 데리고 섬으로 피신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인 충남 보령 앞바다에는 안면도를 비롯해 삽시도, 원산도, 장고도, 덕적도 등이 있고 서천에서 가까운 부안과 김제 앞바다에도 선유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때부터 지함은 섬과 바다에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나중 수선(水仙/바다의 신선)이라는 호도 쓰며 배를 이용해 전국 곳곳을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함이 정확히 몇 년 동안 잠행 생활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조카 이산해가 쓴 '이지함 묘갈명'에서 5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고 한 시기가 이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함은 섬사람의 거친 삶의 현장을 체험하며 전국의 어부들로부터 바다와 섬에 관한 지식과 항해술과 조류의 흐름 등 지식을 얻었을 뿐 아니라 섬사람들의 생활과 어업등 수산업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을 것이다. “한 조각 작은 배를 타고 배의 네 귀퉁이에 커다란 바가지를 달아가지고 세 번 이나 제주에 들어갔으나 풍랑의 우환은 없었다고 한다. 손수 장사를 하며 백성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빈손으로 생업을 경영해 수년 안에 곡식 수 만석을 쌓았다가 빈민들에게 나눠주고는 소매를 털고 가버렸다. 바다 가운데 들어가서 (섬에)박을 심어 박이 수 만개 열렸다. 그것을 쪼개 바가지를 만들어서 곡식 몇 천석과 바꾸었다. 곡식을 경강의 마포에 옮겨다가 강촌사람들을 모아서 흙을 쌓아 토실을 만들었다." (어떤 사람의 기사에 나옴)- 출처 토정유사 (한국의 민속종교사상) 토정 이지함의 섬과 바다에 대한 인식은 신분관으로도 이어진다. 조선시대의 신분은 사농공상으로 사실상 어업이나 뱃일은 위 네 신분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천인들이 하는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다음은 병자년 (선조9년 1576년) 백사 이항복과 나중 인조의 장인이 된 유천 한준겸이 사마초시에 합격하고 회시준비를 하면서 이지함이 기거하던 마포 토정에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면서 강의도 받고 나눈 대화이다. 이항복이 묻기를 “학식이 뛰어난 숨은 인재를 본 일이 있습니까?”하자 토정은 많은 인재를 알고 있다면서도 그 가운데서 최고급의 인물 두 사람과 그다음 인물 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답한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그 한 사람은 항상 바다 위에 있으면서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충청도 해상에서 만났는데 10여년 뒤 전라도 바닷가에서 만났다. 뱃짐도 적당히 싣고 운임도 욕심을 부려 받지 않았고, 일찍이 먼 바다에 고기잡이를 가는데 청하여 같이 갔다. 그가 키를 잡고 노를 젓는 것은 다른 어부들이 따를 수가 없었고, 딸이 고기값을 시장 가격의 배를 받자 반값을 되돌려주게 했다. 성명을 물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백사 이상국(항복)이 기록한 바에 나옴) -출처 토정유사 (한국의 민속종교사상, 삼성출판사) 두 번째 인물은 예순 가까운 늙은 나이에 책 읽기를 좋아하며 사제의 도리를 다하는 서치무, 세 번째 인물은 서얼 출신의 서기로 가난하고 신분이 미천하나 학문을 좋아해 지함이 재물을 내어 공부를 시켜 나중 혼천의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훗날 서인세력의 중심이 된 이항복이 자신의 문집에 기록한 것을 보면 이 때 토정의 답변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듯하다. 토정은 당시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어부와 뱃사람을 최고급의 인물로 꼽은 것인데 이들에게 진정한 관료가 되면 신분을 가리지 말고 백성들의 실생활에 들어가 필요한 인재를 발굴하고 실용을 배우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지함은 이념이나 붕당, 신분 등을 가리지 않고 만나는 친화력과 개방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삶을 살았으며 전라도 지역도 방문한 기록이 있다. 뱃길로 순천을 거쳐 훗날 의병장이 되는 고경명과 무등산에서 만나 불이(不二)라는 서제 이름을 지어준다. 특히 제주에서 배를 타고 전라좌수영에 잠시 머물 때 글공부에 관심이 많은 어린 관노비 김순종을 절도사에게 관노비에서 빼줄 것을 허락받고 자신의 고향인 보령으로 데려와 그 아이를 직접 가르쳐 사마시 과거에 합격시키고 결혼까지 주선했다고 전한다. ■상소를 통해서 본 섬과 바다의 인식 평생 재야생활을 한 토정 이지함의 직접 저술은 많지 않다. 말년에 지방관료에 천거돼 맡은 두 개의 상소문과 대인설과, 피지음설 욕심을 적게하는 과욕설 등 간단한 설 세 편, 그리고 운장 송익필의 시를 차운한 시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차운한 시 두 편 등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조 1573년 토정 이지함은 조정대신들의 유일이라는 천거제도에 따라 57살 나이에 종6품 벼슬을 받고 포천현감에 부임하게 된다. 토정은 비록 지방관료지만 포천현의 상황과 백성을 구제할 방책을 임금에게 상소를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듯하다. 포천현의 폐해를 진술해 올린 상소문은 이지함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글로 평가 받고 있다. 상소문에서 포천현의 실상을 죽음을 앞둔 병든 거지아이라고 표현하고 곡식이 부족한 가난의 원인을 백성의 게으름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한다. 구제 방법을 상책과 중책, 하책으로 구분해 지배층의 책임과 도덕성 회복 등 도덕의 창고를 여는 것은 임금이 풀어야할 상책, 적재적소 인물 등용 등 인재의 창고를 여는 것은 임금과 중앙관료가 해결해야 할 중책으로 자신의 권한을 벗어난다. 다만 포천 현감인 자신이 할 일은 하책인 바다와 육지의 창고를 열어 가난을 구제하는 구체적인 사업 대안을 제시한다. 즉 가난은 정부의 식량 창고를 열어 구제할 수도 없고 근본적으로 본업으로 여기는 농업에 의존하는 시각을 벗어나 섬과 바다의 무궁한 자원을 활용하고 그리고 광업 상업 등 말업으로 보충하는 등 산업 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본(本)과 말(末)의 상호 보완론이다. "물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는 전라도 만경(萬頃)현에 양초주(洋草洲)라는 곳이 있는데 공(公)에도 사(私)에도 소속된 곳이 없습니다. 만약 이곳을 잠깐 포천에 소속시킨다면 물고기를 잡아서 곡식을 바꾸면 수년 안에 수천 석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소금은 황해도 풍천부(豊川府)에 초도정(椒島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공에도 사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곳을 우선 포천에 소속시킨다면 소금을 구어서 곡식을 바꾸면 수년 안에 또한 수 천석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포천현의 창고에 저장해 두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 쓰고 관비(官費)를 쓰게 해 원곡(元穀)의 회계에서 영구히 한 섬도 감하지 않는다면 미속(米粟)이 점점 감축될 염려가 없어져 영세(永世)에 항상 풍족한 즐거움이 있겠습니다. 더구나 조처를 잘하면 수만(數萬)의 자본을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포천이 다른 날 국가의 대보장(大保障:일이 잘되도록 크게 보호하거나 뒷받침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포천이 이미 회복돼 소생한 뒤에는 양초주와 초도정은 또 피폐한 열읍(列邑)에 옮겨주어 포천에서 한 것과 같이 한다면 널리 베풀어 여러 사람을 건지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출처 토정집 리포천시상소) 만경현 양초주에서 황해도 초도정까지 구체적인 사업 장소까지 열거하는 것은 토정 이지함이 얼마만큼 바다와 섬의 장점을 파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백성의 가난구제와 국부를 위해 현장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생각해 왔다는 반증이다. 상소문에서는 행정 관할주의 활용에 따른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 "모든 산물은 다만 그 고을에서 취하며 쓰고 다른 고을에 있는 것은 항상 금지하여 취용(取用)하지 못하게 하니 이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타도(他道)나 타관(他官)일 지라도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는데, 포천에는 바다가 없으니 해물을 다른 고을의 경계 안에서 채취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다고 합니까." -출처 토정집 리포천시상소 구체적인 사업 실천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고기 잡고 소금 굽는데 부역(赴役)할 사람에 대해서는 자원하는 자를 모집해, 백성과 더불어 이(利)를 나눈다면 국가에서는 한 섬의 곡식도 소비하지 않고 한사람 인부의 힘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만인의 목숨을 살릴 수 있습니다. 고을도 백년의 계책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습니까." -출처 토정집 리포천시상소 이런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포천 현감직을 곧바로 사임한다. 토정 이지함은 실학의 대표 사상가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 보다 150년 앞선 인물로 정약용이 주어진 법과 제도 안에서 실용주의 개혁을 주장한 반면 토정은 국부를 증진하고 백성들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역 관할 주의에 얽매인 규제를 풀어 어려움을 해결하자는 이른바 실용적 개혁론을 폈다. 또 농업(본업)에만 의존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백성의 삶을 바다와 상공업(말업)을 통해 농업을 보완하고 부를 높여야 하고 필요하면 류쿠(오키나와)와 해상교역을 해야 한다는 조선의 해금정책을 완화해야 한다는 국가정책 개조론 주장을 펴기도 했다. 특히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치유가 힘든 국가적 시혜보다는 지역과 개인의 강점을 살려야 한다는 자립형 또는 생산적 사회경제복지 정책 등을 제안하고 있다. 다음은 토정이 포천현감으로 있으면서 굶주림으로 남편을 잃은 40대 여인을 만났던 기록을 선조임금에게 보낸 상소문에 담긴 내용이다. “여인이 말하기를 ‘나의 기혈이 말라 세 살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못한 것이 또한 오래되었습니다. 단옷날 밤중에 어린 애의 손발이 겨울 추위처럼 떨었습니다. 곧 놀라 일어나 손을 아이 입에 대니 숨이 이미 끊어졌습니다. 방 안에 달려가 항아리의 바닥을 손으로 쓸어 우연히 쌀 낟알을 찾아냈습니다. 급히 씹어 물에 타 입에 부었더니 조금 뒤 숨이 통하였습니다. 이후 며칠이나 더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흐느꼈습니다. 말을 다 잇지도 못했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그 얼굴색을 보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토정은 아산현감 시절 올린 상소문에 일가친척의 군역까지 져야 하는 제도 때문에 나이 70세가 넘도록 결혼을 못하거나 고향을 떠나는 사례를 지적하고 나쁜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다. “가난한 백성이 졸지에 (친척의 군역을) 변제하지 못하면 옥에 가두고 독촉합니다. 남자들은 자신이 번을 사고 또 일가의 번까지 서야 합니다. 여자들은 자신의 가족에게 배당된 군포를 관청에 바치고 또다시 일족의 군포까지 바쳐야 합니다. 남자는 군대 행렬에서 울 고 여자는 감옥에서 울부짖습니다. 농사와 누에 치는 일이 제 때를 잃어, 입고 먹을 것이 모두 없습니다. 때문에 흩어지고 달아나고 숨어서 타향으로 사라져 없어지기에 이릅니다” -토정 이지함의 구빈정책 토정 이지함의 최대 업적은 아산 현감 부임 즉시 설립한 큰 집으로 불려졌던 ‘걸인청’이다. 유리걸식하는 걸인들을 1대1로 상담해 길쌈과 땔감 장사 등 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업을 선택하도록 권했다. 잘하는 일이 없다는 걸인들에게 짚신을 삼도록 해 생활자금을 마련하게 했다. 비록 토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결말이 흐지부지 됐으나 조선왕조 500년간 참신하고 ‘현대적 사회복지제도’인 시도는 전무후무했다. 또 토정은 본업인 농업과 말업인 상공업을 상호보완하는 경제정책을 취할 것으로 주장했다. 이를 통해 국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빈사상에서 탈피해 지역 자립형 생산적 복지사상을 포천현감 재직 시에 건의했다. “(구빈을 위해) 논자들은 조정에 요청해 중앙창고의 쌀과 부자 고을의 곡식을 가져와 구제한다면 어찌 어렵겠는가 라고 합니다.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중앙과 다른 고을 곡식을 포천에 가져온 것이 이미 5~6천 석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굶주림과 곤궁함은 이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경창의 양곡과 부유한 고을의 곡식도 그 수량은 한정 돼 있습니다. 전국의 궁핍한 고을에서 끝없이 진휼을 청하고 창고의 곡식을 내주는 일이 거듭되면 조정도 계속할 도리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밑바닥이 새는 잔은 드넓은 바닷물로도 채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대개 덕은 근본이라고 할 수 있고 재물은 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과 말단은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말단을 제어하고 말단으로 근본을 보충한 다음에야 사람의 도리가 궁색하지 않게 됩니다. 재물을 생산하는 도리 역시 근본과 말단이 있습니다. 곡식을 생산하는 농업이 근본이라면 소금을 굽거나 철을 주조하는 일은 말단입니다. 근본인 농업으로 말업인 상공업을 제어하고 말업인 상공업으로 근본인 농업을 보충한 뒤에야 모든 재용이 궁핍하지 않게 됩니다.” 토정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열악한 포천재정과 현민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전 국토에 묻힌 은과 옥 등 광물자원 개발과 무인도와 바다를 활용한 수산자원 개발을 허가해줄 것 을 상소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후대의 실학자인 박제가는 그의 책 「북학의」에서 “토정 이지함은 일찍이 다른 나라의 상선 여러 척과 통상하고자 했다.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앞선 견해가 너무 탁월해 진실로 다가갈 수가 없는 마음이다.” 라고 술회했다. -삼대부고론(三大府庫論)과 해외통상론 주장 이지함은 1573년에 포천현감에, 1578년에 아산현감에 부임하여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잡았다. 특히 포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올린 상소문에는 그가 지향한 사회경제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이지함은 당시 포천현의 실상을 보고하면서 "포천현의 형편은 이를테면 어미가 없는 고아 비렁뱅이가 오장(五臟)이 병들어서 온몸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 라 하여 당시 포천현이 매우 곤궁한 처지에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현실의 문제점을 없앨 수 있는 방책으로 크게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 이지함은 먼저 제왕(帝王)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하고,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상책이며, 인재를 뽑는 창고인 이조와 병조의 관리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이 중책이며, 백 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 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하책으로 정의했다. 이 중에서 이지함이 중점을 둔 것은 하책이었다. 이지함이 하책을 강조한 것은 결국 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연결되며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상업과 수공업, 수산업 중시 사상과도 연결된다. 아래의 기록은 실학자로서의 이지함의 모습을 매우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땅과 바다는 백 가지 재용의 창고입니다. 이것은 형이하의 것으로써 이것에 의존하지 않고서 능히 국가를 다스린 사람은 없습니다. 진실로 이것을 개발한 즉 그 이익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질 것이니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씨뿌리고 나무 심는 일은 진실로 백성을 살리는 근본입니다. 따라서 은(銀)은 가히 주조할 것이며, 옥(玉)은 채굴할 것이며, 고기는 잡을 것이며, 소금은 굽는 데 이를 것입니다. 사적인 경영으로 이익을 좋아하고 남는 것을 탐내고 후한 것에 인색함은 비록 소인들이 유혹하는 바이고 군자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지만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 또한 성인(聖人)이 할 일입니다." 백성들의 이익을 무엇보다 우선한 이지함의 사회경제 사상은 주자성리학의 철학적 측면이 강조되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보면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농업이 중시되고 상업이나 수공업이 천시된 당시 사회에서 백성들의 생활향상을 위한 방안으로 이지함만큼 적극적으로 농업이 아닌 산업의 가치를 인정한 학자는 흔치 않았다. 이지함은 국부의 증대 방안으로 어업이나 상업, 수공업, 광업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육지건 해양이건 국토에서 산출된 자원을 적극 개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민간의 실상을 직접 경험한 바탕 위에서 형성된 이지함의 사상은 조선후기 북학파로 지칭되는 후대 학자들의 이념과 합치되는 부분이 많다. 18세기 박제가와 같은 북학파 학자는 200년 전에 이미 상업의 중요성과 해외통상론을 주장한 이지함의 사상에 깊이 감탄했다고 한다. 이지함은 유교성리학이 중심이 된 16세기 완고한 조선중기에 개방적이고 다양한 사상을 견지하면서 농업 중심의 경제 사상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 실용적인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토정의 적극적인 민생 안정과 국부 증대, 그리고 백성 본위의 사회경제 사상은 200여년 뒤 남인 실학자나 북학파 학자들이 제기한 사회경제 사상의 원류가 되었다. 이러한 점 등을 고려한다면 이지함은 시대를 앞서간 실학의 선구자로도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5.참고]신라 하대 해상왕 장보고 생애와 업적 장보고(張寶高/ 777?~ 841)라고도 한다.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평민 출신(海島人)으로 여겨진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대성(大姓)인 장씨(張氏)를 모방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고 물에 익숙하였다. 청년기에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에 복무해 장교가 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각지에 절도사(節度使)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군벌의 속성과 그들의 군대양성 방법을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山東省)등주(登州)까지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고, 양주(揚州) · 소주(蘇州) · 명주(明州) 등지에서 아라비아 · 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는 한편, 중국과 신라 · 일본을 내왕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자들도 많았다. 해안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했던 장보고는 이러한 해상무역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더불어 이해하게 되었다. 한편 그 무렵 당나라나 신라 모두 중앙 집권력이 느슨해져 흉년과 기근이 들면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였고, 바다에서도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해 많은 주민들을 잡아가서 중국에 노예로 팔았으며 무역선도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장보고는 해적들이 신라인을 잡아가는 것에 대해 분노했고, 국제무역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졌으며,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해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볼 야망을 불태웠다. 그러던 그가 중국에서 크게 입신하지 못하자 마침내 828년(흥덕왕 3) 귀국하였다. 장보고는 왕에게 남해의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는 진골귀족간의 대립이 심한 데다, 귀족 연립정권적인 성격을 띤 중앙정부는 거기에까지 적극적인 힘을 뻗칠 여력이 없었다. 왕의 승인을 받고 지방민을 규합해 일종의 민군(民軍) 조직으로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였다. 청해진은 건설될 때부터 장보고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그에게 내려진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벼슬도 신라의 관직 체계에는 없는 별도의 직함이었던 점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청해진을 건설한 뒤, 곧 해적을 소탕해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토대로 당과 신라 ·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하였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과 함께 외교 교섭까지 시도하였다. 840년(문성왕 2)에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해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냈다. 이러한 시도는 일본측의 국제관례에 따라 거부되었지만 무역은 계속되었다. 또한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의 인솔하에 교관선(交關船)을 보내어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회역사와 견당매물사의 칭호가 붙은 교역사절을 파견했다는 사실은 그가 일반 무역상인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일본의 지방관과 승려 엔닌(圓仁)이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귀국을 보살펴줄 것을 탄원했다는 것은 일본 · 신라 · 당을 잇는 당대의 해상교통로에서 그의 위세가 국제적으로 인정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산동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고 이를 지원하였다. 이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이 되며,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서 법회 때에는 한꺼번에 250여 명이 참석했던 적도 있었다. 이처럼 장보고의 세력이 중국 동해안의 신라인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또한 그 자신이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으므로,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812년(헌덕왕 7) 흉년이 들자 170여 명의 굶주린 자들이 바다 건너 중국의 저장(浙江)지역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으며, 이 무렵 일본에 300여 명이 건너갔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분화의 진전과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면서 흉년이라도 들면 많은 빈민들이 삶을 찾아 바다로 나가거나 떠돌아다녔다. 장보고는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한 것이다. 8세기 이래 왕성했던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해 이들을 묶어 조직화했고 그의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후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해 하나의 큰 지방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836년(흥덕왕11) 수도에서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신무왕) 일파가 청해진으로 피난와서 그에게 의탁하였다. 838년(희강왕3) 수도에서 다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김우징의 지원요청을 받아 장보고는 군대를 경주에 보내 반격해 그리하여 김우징이 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은 그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는 동시에 식읍(食邑:토지와 백성) 이천호(二千戶)로 봉했다.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이 부친이 약속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려 하자 중앙귀족들은 반대하였다. 그 뒤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깊어졌고 중앙정부에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 그를 암살했다. 장보고가 죽은 뒤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다 851년(문성왕 13)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에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렸다. 장보고는 불의에 피살되었으나, 그는 8세기 후반 이후 신라인의 해상활동의 한 정점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시전) 참고문헌] 강봉룡, 장보고 한얼미디어, 2004년 장용기 ‘토정이지함 사회복지사상연구’ 초당대박사학위 논문 2018 김용덕, 남만성, ‘토정집’ 한국의 민속종교사상, 삼성출판사 1985. 김용덕, ‘이지함의 경제사상’ 『한국의 사상』열음사, 1984. 한정주, 토정 이지함-중상주의 통해 부국 지향한 조선사 최초의 경제학자 2007. 신병주,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박성환. 막스 베버의 문화사회학과 인간학, 문학과지성사 ,1992년 막스베버 ,경제와 사회 – 공동체들 박성환 역. 나남2009년 막스베버.소명으로서의 정치. 박상훈역 후마니타스 2013 막스베버, 나무위키 2022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끝)
    • 오피니언
    • 칼럼
    2024-05-04
  • “마약과의 전쟁”
    최근 모 연예인의 마약투약 혐의와 더불어 대한민국 전역에서 마약과 관련한 기사들이 쏟아지고있다. 과거 마약은 일부 소수계층의 일탈로만 여겨져 왔었고, 실제로 주변에서 마약사범을 직접 보기란 어려웠기 때문에 그 심각성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안일하게 인식되어 왔었다. 하지만 마약이 사회에 점차 퍼지게 되면서 우리나라도 더 이상 마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라가 됐다. 실제로 인구 10만 명당 마약 사범이 20명을 넘어, 유엔에서 정한 ‘마약청정국’의 범위를 이미 넘어섰고 지난해 국내에서 마약류 사범으로 단속된 사람은 2만 7611명으로 5년전(1만2613명)보다 2배이상 증가했다. 20,30대 마약범죄율이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되는 요인은 클럽이나 술집 등 밀폐되고 범죄에 취약한 환경에 쉽게 노출된다는 점과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SNS 미디어 사용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별다른 규제없이 마약에 관련한 컨텐츠를 검색하여 해당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이에 더 나아가 SNS를 자주 사용하는 청소년들에게까지도 마약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성장기 청소년들의 뇌는 중독의 영향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여 훨씬 더 치명적이고, 중독의 위험도가 높다. 이는 성인과 비교했을 때 단기간 적은 양의 투약으로도 뇌의 손상 정도가 심각하기에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마약은 뇌 신경세포 사이 공간인 시냅스를 비롯해 뇌 구조와 기능에 수백 가지 변화를 일으킨다. 뇌는 한번 변형되면 복원되지 않는 ‘가소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중독자들이 다시 약을 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시달리게 한다, 즉 마약을 단 한 번만 투약하더라도 영구적으로 뇌가 망가지는 것이다. 마약도 술과 담배와 같은 중독물질로, 한번 중독되면 내성이 생겨 더 강력한 마약을 갈구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적, 사회적으로 마약의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집중해야한다. 전라남도경찰청은 지난 3월부터 7월 31일까지 5개월간 마약류 범죄를 집중단속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학생 신분의 중독자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초중고, 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기관 차원의 조기 예방교육이 함께 도모되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약범죄를 단속하고 처벌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끝없는 쾌락을 향한 늪에 빠져 살고 있는 마약사범들이 적절한 치료 받을 수 있도록 우리 구성원 모두가 관심을 갖고 이끌어 줘 그들이 다시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4-29
  • 기고]'목포 평생교육 노인복지관 건립' 제안한다. -박기민부회장(대한노인회 목포시지회)-
    「목포시 노인 종합사회복지관 건립」을 제안한다. 1. 건립제안 필요성 시민들의 삶의 터전인 낭만의 항구 「목포」는 1897년 개항하여 일제 강점기간 육지와 바다의 ‘목’이 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하여 한때는 10대 도시에 들만큼 번창하였으나 해방이후 중앙정부로부터 항상 소외된 도시로 낙인되고 최근의 인구 감소 추세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퇴락하고 있다. 인구 22만명으로 대한민국의 중소도시에서도 가장 면적이 협소하고 노령 인구의 속도도 빠르게 늘어나는 도시의 침체 현상이 날로 심화되어가고 있다. 물론 고령화 사회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소산다사(少産多死)문제 등은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라지만 유독히도 목포는 도시 면적의 협소와 여섯 차례에 걸쳐 실패한 인근 자치단체와의 통합 실패로 젊은이들이 만족할 만한 정주 여건을 채우지 못하여 감소 인구의 40%가 인근 무안 지역 신도심으로 빠져나가는 수평 이동과 협소한 면적으로 대기업을 유치할만한 공단도 제대로 조성할 수 없는 빈약한 중소도시로 전락하였다. 인구 감소의 요인이 되고 있는 청년문제와 더불어 늘어나는 노령화 문제도 목포가 안고 풀어야 할 큰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작년 10월말 자료에 의하면 목포시 총인구 214,448명중 65세 이상의 인구는 42,215명으로 19.69%를 차지하고 있다. 목포는 젊은이들이 살만한 도시가 되지 못한데다가 인구의 고령화도 심각하여 전국 94위 인구의 초라한 이 도시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는 기가 막힌 정책과 패러다임 전환이 어느 도시보다 절실한 때이다. 특히 목포시 노인복지시설의 협소함과 부족함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종합복지 타운이 건설되어야 함을 제안한다. 이에는 2028년 이전하는 구도심의 학교 부지를 활용하여 통합된 종합복지관을 확보하고 노인회관도 단독 건물로 독립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지금 현재 목포시내에는 시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는 2개의 복지관이 있다. 호남동에 위치한 「목포 복지관」과 해안로에 위치한 「하나 복지관」이다. 먼저 목포시 노인복지회관은 1982년 2월 1일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목포시지회가 발족한 이래로 초대 회장 차남석님이 발판을 다지고 2대 회장 장석진님의 임기 중에 노인회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지회 임원들과 경로당 회원들이 성금을 출연하고 국ㆍ도ㆍ시비를 확보하여 1992년 12월 26일 목포시 대성동에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372평의 노인회관을 건립함으로써 많은 노인들의 숙원을 해소하고 노인복지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나 회관소재지가 목포시 대성지구 개발계획에 포함됨에 따라 2010년 노인회관이 철거되고 본 지회는 만호동으로 복지관은 구 성신간호대학 건물로 임시 이전하여 업무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후 민선 6기 박홍률 시장의 드높은 지원 의지로 39억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당시 박지원국회의원과 강성휘, 고경석, 권 욱, 김 탁, 배종범 도의원의 적극적인 성원과 협조 그리고 많은 노인 지도자들의 참여와 헌신적 노력이 더해져 현재 위치에 지하 1층 지상 4층 연건평 600평 규모의 노인회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1982년 1월 18일 건립된 하나복지관의 건물은 2008년까지 서울은행, 하나은행 건물로 사용하다가 목포시에 무상 증여함으로써 복지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두 복지관의 건물 개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1〉 목포복지관 & 하나복지관의 시설 개요 구분 목포복지관 하나복지관 계 비고 연건평 2,141.19㎡ 1,635.51㎡ 3,776.70㎡ 연간 시설 이용자 8만4천여명 8만여명 16만여명 건물 준공일 2017.12.20 1982.1.18 지하1층, 지상4층 지하1층, 지상4층 2. 문제점 1) 양 복지관 공히 개설하여 운영하는 프로그램 강의실이 협소하고 강의실 부족으로 이용자들의 교육 수요를 충분히 감당하지 못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 개설이 반영되지 못하는 형편이다. 2) 두 복지관은 각각 연간 8만여명의 시니어들이 이용하는 시설임에도 주차 공간이 절대 부족하여 주변 상가 와 주거지에서 불편을 호소하며 교통 민원을 수시로 제기하고 있다. 3) 시설에 비해 좁은 밀집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안전 사고를 예방하고 대응할 수 있는 인력과 공간 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4) 시니어들의 주요 이용 시설인 교육 공간의 절대 부족과 협소함은 휴게 공간과 급식 시설의 면적도 협소하 여 이용자들의 품격을 격하시키고 있는 지경이다. 5) 하나 복지관은 30여년 전에 준공한 건물의 노후화로 붕괴 위험성이 있으며 시설 이용자들의 안전 사고 개 연성이 다분하다. 4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은 물론이고 복도의 폭도 좁아 쌍방 통행으로 충돌의 가능성이 상존하여 곳곳에 직원들이 항상 배치되어 추락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안전 지도에 과다한 시간과 인력을 투여하고 있는 형편이다. 6) 목포복지관은 협소한 건평에 노인회 목포 지회, 목포복지관, 무공수훈자회 지회 등의 3개 기관이 함께 사용 중으로 건평도 협소하고 특히 주차 공간이 절대 부족하여 시설 이용자들의 불편이 심각한 지경이다. 3. 대책 제안 1) 양 복지관이 소재한 목포시 구도심권에 존치하고 있는 목포고등학교와 목포여자고등학교가 통합하여 2028 년 3월1일 옥암지구에 개교하게 된다. 2) 양교의 폐교 중 1곳에 두 복지관을 통합한 가칭 「목포시 종합사회 복지관」 건립을 제안한다. 양교의 시설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구분 목포고등학교 목포여자고등학교 비고 연면적 14,746㎡ 11,368㎡ 운동장 면적 14,250㎡ 9,193㎡ 교실 & 관리실 75 71 기타 강당, 도서관, 급식실, 기숙사 등 〈표2〉 목포고등학교 & 목포여자고등학교 시설 개요 4. 「종합사회 복지관」 건립에 따른 효과 1) 폐교에 따른 건물 철거의 비용을 절약하고 복지관 시설에 따른 리모델링 비용만 소용된다. 2) 현재 양 복지관의 합계 연면적이 3,776.70㎡임에 비해 목포고등학교의 연면적은 5배 수준(14,746㎡)이고 목포여자고등학교의 연면적은 4배 수준(11,368㎡) 에 이르러 복지관의 다양한 이용 시설을 확보할 수 있다. 3) 운동장은 시니어들의 운동 공간을 확보하여 게이트 볼장, 트랙시설, 체육시설 등을 설치한다. 4) 실내 체육관 역시 각종 구기 종목의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5) 급식실은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아도 대형 급식실로 사용할 수 있다. 6) 도서실 역시 시니어들의 휴게 888999쉼터 및 도서관으로 사용한다. 7) 기숙사 시설은 노인 주간 보호 시설 등 복지 시설로 개조하여 사용한다. 8) 교육 프로그램 운영실도 인문사회 과학, 자연 과학, 예능관, 정보관 등으로 구분하여 배치함으로써 전문화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할 수 있다 9) 휴게시설 공간과 녹지 공간을 확보하여 힐링할 수 있는 여가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9) 시니어 대상 각종 발표회나 공연 등을 개최할 수 있는 대형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10) 시니어 재활 센터를 마련하여 자급 생산, 판매까지 연계하여 일자리 창출 센터의 역할도 할 수 있다. 11) 충분한 주차 시설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시설 이용자들의 교통 불편을 해소할 수 있다. 주차는 등록된 회원들에 한해서 이용하며 소정의 주차료를 부과할 수 있다. 12) 현 목포복지관이 분리하여 이전하게 되면 「목포시 노인지회」도 단독 건물을 보유하게 되어 각종 활동 공간 을 확보할 수 있다. 13) 시니어들이 거주를 선호하는 구도심권의 중심 시설로 거듭남으로써 경제 활동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14) 상설 전시관을 개설하여 시니어들의 창작활동을 고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 날 수 있다. 15) 화재대비 시설이나 엘리베이터 설치도 되어 있어 별도의 공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5. 마치면서 대도시가 아니더라도 수도권 중소도시 곳곳에는 요즘 시니어들의 스포츠 종목으로 떠오르고 있는 전천후 실내 게이트장이 시설되어 있음을 목도할 수 있다. 우리 목포 지역도 시니어들이 쉴 수 있는 작은 공원! 젊은이들의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놀이터! 식당을 가도 도서관을 가도 놀이 시설을 가도 시니어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노령인구가 괄목상대로 늘어나는 이 지역 목포에도 작은 시니어 공원을 겸한 종합 사회복지관이 들어 섰으면 한다. 지금 목포의 두 복지관을 가보면 좁은 공간에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할 여지가 턱 없이 부족하다. 교육 공간도 부족하여 수요자의 배움 욕구를 충분히 채우지 못하고 다수의 노년사회화 교육 프로그램마다 2:1, 3;1의 경쟁률로 추첨에 낙방한 교육 희망자들의 불만이 속출한다. 모든 부족함을 채워 주는 인프라가 갖추어진 타운이 들어서기를 갈망하면서 때 마침 이전하는 학교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붙잡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제안을 한다.(끝) ------ (제안] 박기민부회장은 1950년 생으로 목포에 살고 있다. 소방공무원으로 공직에 입문해 무안군청 민방위과를 거쳐 전남 소방공무원으로 퇴임했다. 민방위강사와 학교안전관리 강사, 노인심리삼담사, (사) 대한노인회 목포시지회부회장, 대한호스피스 웰다잉협회 전남도지부장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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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4
  • 기고]산뜻한 봄날의 등산, 안전이 우선! (김승용 해남소방서)
    [해남소방서 예방안전과 소방위 김승용] 봄철, 따뜻해진 날씨와 함께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산을 찾는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시기에 산악사고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어, 안전한 등산을 위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이번 기고문에서 봄철 등산 시 발생할 수 있는 주요 사고 원인을 파악하고, 사고를 예방하며 대처하는 데 필요한 요령을 제시하고자 한다. 주요 사고 원인으로는 첫째, 기상 조건의 변화성이다. 봄철 기온의 급격한 변화와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는 등산객들에게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등산 전에는 반드시 기상예보를 확인하고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만약 기상 조건이 급격히 악화된다면, 안전을 위해 즉시 하산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현명하다. 하산할 때는 안전을 위해 사전에 등산로를 숙지하고, 비상 시 사용할 수 있는 대피 경로를 알아두는 것이 좋다. 둘째, 녹는 눈 또는 빗물로 인한 미끄러움이다. 높은 산들중에는 아직도 겨울철 눈이 쌓여있는 곳이 있거나 봄비로 인한 빗물로 미끄러운 곳이 있다. 이에 따라 등산로가 미끄러워지고 때로는 산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에 대비하여, 미끄럼 방지를 위한 등산화와 아이젠(신발 바닥 방향에 스파이크가 있는 등산화) 등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미끄러운 등산로에는 걸음을 작게 하고 중심을 낮추어 걷는 것이 중요하다. 가능하다면 등산 스틱을 사용하여 균형을 유지하고, 낙상 사고를 예방해야 한다. 셋째, 낙석 및 토사 유출이다. 봄철에는 기온 상승으로 인해 얼었던 토양이 녹으면서 낙석이나 토사 유출의 위험이 증가한다. 위험 구간을 통과할 때는 빠르고 조심스럽게 이동하며, 주변 환경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위험을 구간을 통과할 때는 가능한 한 빠르게, 그러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위험 구간은 우회하도록 하자. 넷째, 사고 났다면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119에 신고하자. 119에 나의 위치를 최대한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GPS좌표, 등산로 이름, 가까운 지명, 사용 중인 등산로의 시작점 및 도착점 등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하며 신고한 구조를 위해 119 상황 요원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자. 또 구조대가 쉽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밝은색의 옷이나 손수건 등을 이용하여 신호를 보내거나 배터리를 아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라이트로 구조 신호를 보내자. 산악사고 시 신속하고 정확한 119신고는 구조대가 빠르게 현장에 도착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하며, 사고의 심각성을 최소화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봄철 등산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이다. 하지만, 아름다움 속에 숨어 있는 위험 요소들에 대한 준비와 주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한계를 알고 언제든지 위험을 느낀다면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자.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오늘 달성하지 못한 목표는 내일 또는 다음에 도전할 수 있다. 봄철 산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면서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안전한 산행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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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기고]'부주의로 인한 산불! 예방이 최선이다.'[최완석 해남소방장]
    (해남소방서 소방장 최완석)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따뜻해진 날씨에 상춘객의 발걸음은 저절로 산으로 향한다. 또 그에 맞춰 본격적인 영농철이 시작됐고 해남군의 농민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런 반가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봄철 불청객의 소식이 들린다. 바로 ‘산불’이다. 지난 5년간(2019년~2023년) 해남군에서 발생한 화재 건수는 총 700건으로 그중 봄철에 발생한 화재는 205건으로 4계절 중 가장 많았다. 또 봄철 화재 205건 중 들불, 산불 화재가 105건으로 많은 건수를 차지했다. 이처럼 봄철은 야외활동을 하게끔 만들어 주는 따뜻한 계절이기도 하지만 한순간의 부주의로 인해 뜨거운 봄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계절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봄철에 산불이 많을까? 불을 지펴주는 건조한 날씨, 바싹 마른 낙엽 등의 가연물, 화재 연소 확대를 도와주는 봄철 강풍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봄철 산불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부주의’이다. 이는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며, 등산을 즐기는 등산객, 산에서 캠핑하는 캠핑애호가, 농업에 종사하는 군민들. 즉, 우리 모두가 해당 된다. 하지만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 ‘부주의’를 예방할 수 있다면 매년 반복되는 산불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지 않을까? 소방서는 산불 예방을 위한 산불 대비 예방 순찰과 언론보도, SNS, 캠페인 등 홍보활동을 실시하고 있으며, 산불 진화차 등을 배치해 산불 발생 시 초기 진압을 위한 대응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군민들의 관심과 실천이다. 작은 불씨만으로도 큰 화재로 번질 수 있지만, 작은 관심만으로도 이를 예방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 몇 가지만 기억하고 실천해 보자. 첫째, 산림과 가까운 곳에서는 허가 없는 논·밭두렁이나 쓰레기 소각 등의 행위를 멈춰야 한다. 소각 행위 중 흩날린 불씨가 자칫 산림에 이르면 걷잡을 수 없는 대형화재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별거 아닌 것 같은 ‘부주의’가 나뿐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 둘째, 산림 근처에서는 반드시 금연을 해주길 바란다. 흡연 후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의 불씨로 산불 화재가 빈번히 발생하기 때문이다. 간접흡연도 나쁘지만, 봄철에는 담배꽁초도 매우 나쁘다는 사실 잊지 말자. 셋째, 등산 시 산불의 원인이 되는 화기(라이터, 성냥 등)를 소지하지 않아야 하며, 불법 야영 및 취사는 산불 위험이 크므로 허용 지역 외에는 금지해야 한다. 조리 중 화기 사용으로 인한 화재 또한 매우 빈번히 일어나고 있으니 꼭 주의하자. 넷째, 이미 산불이 시작됐다면 망설이지 말고 즉시 119에 신고하자. 화재 발생 중 초기 화재 진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그러니 바로 신고하되 가능하다면 발화 지점, 진화 방향, 규모 등을 최대한 정확하게 알려주길 바란다. 다섯째, 산불 예방 홍보해 동참해 주시기를 바란다. 주변 사람들에게 산불 예방의 중요성을 알리고 예방 수칙을 함께 실천한다면 충분히 산불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 산불 예방은 비단 소방서, 관계기관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은 불씨로 인한 재앙을 막을 수 있다. 모두가 힘겨웠던 산불을 기억하며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가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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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2
  • [기고]투표하는 발걸음, 민주주의를 향한 큰 걸음 /국승근 선거계장 (함평군선거관리위원회)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우리 모두 한번쯤은 생각해 볼 법한 이야기이지만 대부분 현실성 없는 허무맹랑한 것이라고만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정치에 가장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대의민주주의의 출발이자 가장 핵심이 되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바꾸려는 개개인의 작은 노력은 이제 한달 앞으로 다가온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다. 오는 4월 10일에는 제22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된다. 국회의원선거는 특히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정치의 가장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과정인데 벌써부터 뉴스와 SNS 등 수 많은 미디어를 통해 국선에 관한 각종 소식이 전해지고 있고, 지역의 정치이슈를 접하다 보면서 선거가 다가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이제부터 유권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유권자가 정당과 후보자를 평가하고 정책 방향에 유권자의 생각이 집약되도록 소중한 한 표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내가 선거의 주인이고, 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선거에서 항상 그 권리를 행사해 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이다. “내 한표의 가치와 크기는 바로 우리 유권자가 결정” 선거는 정당과 후보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바로 우리 유권자다. 유권자의 참여 없이는 선거의 정당성을 찾을 수 없으며, 선거 결과 또한 유권자의 선택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선거 과정의 공정성은 정당, 후보자, 선거사무관계자, 선거관리위원회의 몫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유권자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공정한 선거문화는 유권자가 중심이 될 때 완성될 수 있다. 유권자가 정책과 공약에 관심을 보일 때 선거는 정책경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유권자가 불법 선거운동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 불법선거는 근절될 수 있다. 유권자가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할 때 정당과 후보자는 유권자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고, 유권자들이 즐겁고 희망찬 선거 캠페인을 펼친다면 결국 선거는 축제의 장이 펼쳐질 것이고 민주주의 꽃이 피게 될 것이다. 물론 유권자에게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나 하나쯤이야하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유권자의 한 표가 언제,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꾸게 될지 모른다. 대표자를 선출하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더 유효하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유권자의 생각이 표출되면 대표자들의 정당성도 높아지고 정책 결정의 방향성도 더욱 명확해진다. 내 한표의 가치와 크기는 바로 우리 유권자가 결정짓는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선거와 정치에 무관심하다면 누구도 내 생각에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 "투표하는 발걸음, 민주주의를 향한 큰 걸음" 이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이번 국회의원선거에서 내세운 캐치프레이즈다. 대의민주주의는 수많은 유권자 한분 한분이 투표에 참여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해야 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숭고하고 모두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라 할지라도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개개인의 자발적인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건강한 정치 소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또한, 단순하게 투표하는 것만이 유권자의 유일한 역할은 아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하여 가짜뉴스(딥페이크 영상)의 확산 및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우후죽순 퍼져가고 있는데 이러한 잘못된 정보들이 유권자의 선택 과정을 어지럽히는 등 민주주의에 위험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럴수록 유권자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선거‧정치 정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건강한 정치 소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이처럼 유권자가 여러 후보자 및 정당을 관심있게 그리고 까다롭게 선별한 후 사전투표일인 4월 5일(금)과 4월 6일(토)에는 인근 사전투표소에서, 그리고 선거일인 4월 10일에는 주소지 투표소에서 투표할 수 있다.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제22대 국회의원선거, 당신의 투표하는 발걸음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큰 걸음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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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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